광고

[전현우의 플랫폼] 문과 플랫폼 사이, 틈새에 남아 있는 것

전현우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3/31 [09:00]

[전현우의 플랫폼] 문과 플랫폼 사이, 틈새에 남아 있는 것

전현우 객원기자 | 입력 : 2021/03/31 [09:00]

= 각기 다른 사정과 목표를 가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단 한 편의 열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그리고 이런 풍경이 매일같이, 거대 도시와 광역망, 전국망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이 사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이 사실을 가능하게 만든 제도·역사·지리·경제·공학을 되짚어 보는 것. 또한 철도가 이들에게 다시 돌려준 것들을 살펴보는 것. 바로 <플랫폼>의 목적이다 =

 

▲ 객차와 플랫폼의 틈새. 2021년 3월 27일 저녁 인천역 승강장에서. 저자의 발 폭(약 10cm)으로 틈새 너비를 짐작할 수 있다.  © 전현우 객원기자

 

[철도경제=전현우 객원기자/서울시립대 자연과학연구소] 계단을 오르는 당신, 객차의 문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발 아래. 목이 조금 아프더라도, 잠깐 발 아래를 살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의 틈새가 보일 것이다.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오래된 역이라면 담배꽁초 같은 각종 작은 쓰레기들이, 아니면 잡초들이 고개를 내밀고 당신과 시선을 교환할지 모르겠다. 잘 관리된 역이라면 자갈, 또는 어두운 색깔의 콘크리트만이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단 1초도 머무르지 않는 문자 그대로 틈새. 이 틈새는, ‘저상’ 승강장을 ‘고상’ 승강장으로 바꾸어도 여전히 없앨 수 없다. 열차 측면과 플랫폼 측면을 서로 부딫치지 않게 하려면 그렇다. 

 

이동하는 열차는 차축이나 레일의 불규칙한 마모 등으로 인하여 측면 방향(‘요yaw’ 축을 중심으로 회전)으로도 흔들릴 수 있고, 그만큼의 여유를 주어야만 차량의 측면과 플랫폼의 측면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곡선으로 승강장이 건설된 역이라면 직선인 열차 벽과 곡선으로 지어진 승강장 사이에 벽이 생기는 문제까지 더해진다.

 

열차를 부드럽게 움직이게 만들기 위한 틈새의 역할은, 그러나 여전히 잔여 위험(residual risk)을 남긴다. 

 

잔여 위험이란, 어떤 위험이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수행했던 체계의 개량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종류의 위험을 의미한다. 저상 승강장을 고상 승강장으로 변경했을 때, 대처하려던 위험은 노약자와 휠체어가 계단 때문에 발이 묶이는 상황일 것이다. 고상 승강장은 다리가 없는 이들에게 다리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지도, 무리한 토크를 요구하지도 않는 만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남는 틈새, 이 잔여물은 사람들에게 잔여 위험을 남긴다. 스크린도어 덕에 크게 줄어들었지만, 당신은 휴대 전화를 들고 이 틈 위를 지나가다가 전화를 노면으로 떨어뜨리게 될 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 휴대 전화를 조작할 때는 정지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당신의 안전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는 결국 당신의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리고 이 틈새는, 충분히 크게 벌어져 있다면 원래 도움을 주고자 했던 상대, 바퀴에게도 해를 미칠 수 있다. 

 

3년 전, 2018년의 여름이었을 것이다. 4호선 신길온천역을 통과하던 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대도시 서울 철도』를 집필하기 위해 구해놓았던 책(아마도 크리스탈러의 『남부독일의 중심지』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다)을 열차 최후미의 기관실 문 건너편 자리에 앉아 읽던 나는, 내 왼쪽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탑승하려던 유모차의 앞바퀴가 빠져 있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던져놓고 허둥대던 아이 어머니를 달랜 다음, 아이를 고정시켜 놓았던 버클을 풀고 아이를 꺼내려는 찰나, 차장이 기관실 문을 열고 합류했던 기억이다. 아이를 주변 분들(차장이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에게 넘기고, 틈새에 끼어 있던 앞바퀴를 내 손으로 끄집어낼 때 까지.. 아주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당황하여 열려 있는 열차 문에 열차 안쪽을 바라본 채 비스듬히 기대어 놀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아이 어머니를 일으켜 세운 다음, 유모차의 이상까지 살펴보고 다시 앉아서 책을 읽었던 것으로 그 날의 내 기억은 끝이 난다. (아마도 내가 철학사 수업을 하게 된다면, '맹자'를 소개할 때 이 일화를 소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기억에서, 나는 운 좋게 사고로 가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이 ‘니어미스(near miss)’ 상황의 그림자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유모차의 앞바퀴가, 차장실이나 기관실에 멀리 떨어진 열차 중간쯤에서 이 틈새에 빠졌더라면? 아니면, 1인 승무 열차라 승무원까지의 거리가 150m가 넘었다면? 그래서 상황을 승무원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문을 닫으려 했고, 유모차가 낀 채 열차가 출발하게 되었다면? 아니면 아예 무인 열차라, 카메라로만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관제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면? 

 

다행히 단계별로 사고로 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들이 있었고, 그나마 모두가 침착하게 대응하여 이 장치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잔여 위험을 남긴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문과 플랫폼 사이의 틈새를 닫을 수는 없었다. 이 틈새를 닫을 수 있도록, 요잉을 없애 버린 차량이 나오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열차에 오르고 있는 당신은, 그렇다면 철도가 품은 수많은 딜레마 가운데 하나를 품고 있는 공간 위를, 그리고 없앨 수 없는 틈 위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입을 벌리고 있는 잔여 위험의 틈새. 이 틈새 위를 오늘도 수백만 명이 지나다닌다. 우리는 이 틈새, 그리고 계단의 비용이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선택을 하고 있을 뿐, 위험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다. 

 


1. 잔여 위험에 대한 공학적 접근의 초점을 나는 다음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선규, 「잔여 위험을 고려한 위험대응 프로세스 모델」,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논문집 제22권 1호. 2002년 4월 7일 발표. pp. 397~400.

2. 다음 철학 사전의 서술 또한 잔여 위험에 대한 논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Hansson, Sven Ove, "Risk",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8/entries/risk/>.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