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도와 관련된 비사를 꺼내는 <2번 출구> 연재가 진행됩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의 철도와 관련된 과거와 현재의 비사를 통해 미래의 철도 정책 등에서 배울 점 또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철도경제신문=박장식 객원기자]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를 갈 때는 앉아서 가는데, 후쿠오카에서 오사카로 돌아올 때는 누워서 올 수 있는 열차가 있었다. 오래 전 '형사 가제트' 애니메이션에서 외쳤을 법한 '가제트 만능 팔'이 생각나는 이 열차는 특급열차, 침대열차, 그리고 광역전철까지 많은 역할을 가졌다.

어디서나 쓰임이 있는 마당쇠 같은 이 열차, 1967년 도입된 일본의 '581ㆍ583계 전동차'다. 긴 국토로 인해 신칸센 개통과 항공편의 대중화 이전에는 일일생활권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본의 상황, 당시 경제개발로 인해 넘쳐났던 철도 수요를 한 번에 보여주는 이 열차는 낮에는 좌석이 딸린 '특급열차'로, 밤에는 '침대열차'로 활용되는 전천후 차량이었다.

특히 신칸센이 북으로는 도호쿠, 서쪽으로는 히로시마와 후쿠오카까지 이어지며 열차가 남게 되자 변신을 거쳐, 우리의 광역전철 차량에 해당하는 통근형 전동차가 되는 등 전천후 열차로 활용되면서, 반세기 동안 일본 전국을 유랑했던 차량이기도 하다.

581계 전동차가 '월광'이라는 헤드마크를 달고 큐슈철도기념관에 서 있다.  / 박장식 객원기자
581계 전동차가 '월광'이라는 헤드마크를 달고 큐슈철도기념관에 서 있다.  / 박장식 객원기자

'월광' 타고 생겨난 '상경의 꿈'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일본은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맞이한다. 철도 역시 그런 고도성장기 늘어난 이동의 수요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량이 부족했다. 1964년 신칸센의 운행이 시작되면서 가장 붐비는 노선이었던 도쿄-오사카 간 도카이도 본선의 차량 부족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도호쿠나 큐슈 등 지역에서의 이동 수요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상경 수요'도 늘었다. 도호쿠, 호쿠리쿠 등 지방에서 도쿄로의 꿈을 안고 상경하는 시골 청년들도 늘었고, 그에 따라 대도시에서 지방을 잇는 교통 수요도 크게 늘었다. 장거리 열차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열차를 투입하는 것이 해답이지만, 차량기지의 공간 부족과 선로 용량의 문제가 겹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대도시 내에서의 선로 용량도 해결하고, 차량을 덜 투입하면서 최상의 효율을 낼 수 있게끔 하는 방법이 있었다. 출퇴근 시간을 피해 하루 두 번 운행이 가능한 열차, 바로 밤에는 침대열차로 달리고 낮에는 ‘지정석 열차’로 달리는 방법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여객열차는 '전동차의 특급열차, 객차의 침대열차'로 나뉘어 있었다. 1964년 재래선에서의 운행을 위한 특급열차인 485계 전동차가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앞머리가 길쭉한 전기동차가 일본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지만, 침대열차는 기관차에 물려 운행하는 객차의 형태로 운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485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열차가 필요했다. 출근 시간이 지난 낮에는 좌석을 갖춘 특급열차로 운행하고, 퇴근 시간이 마무리되기 전에 기지로 돌아와 열차를 빠르게 정비한 후 침대를 펼쳐 밤에는 야간열차로 운행하는 열차였다. 그렇게 1967년 그런 열차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차량 명칭은 581계였다.

이렇게 운행을 시작한 581계 동차는 1967년 10월 1일, 신오사카에서 하카타까지의 구간에서 첫 운행을 시작했다. 전동차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침대열차가 운행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오사카에서 22시 30분경에 출발한 열차는 9시간을 꼬박 달려 후쿠오카까지 닿았다.

큐슈와 간사이 사이의 밤공기를 싣고 달렸던 이 열차의 이름은 특급 '월광(月光)'. 늦은 밤 열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안고 달린 '월광'은 전동차의 이름까지 스며들어, 이 열차는 '월광형 동차'라는 애칭까지 이어졌다.

581계 전동차는 좌석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좌석으로의 변환이 손쉬웠던 열차였다. / 박장식 객원기자
581계 전동차는 좌석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좌석으로의 변환이 손쉬웠던 열차였다. / 박장식 객원기자

엑스포와 올림픽 때도 달렸던 열차, '통근열차'로 변모하기까지

581계 전동차의 장점은 앞서 이야기했듯 낮에는 특급열차로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국유철도는 밤에 특급 '월광'으로 운행했던 열차를 낮에는 큐슈 동부 오이타까지 운행하는 특급 '미도리'로 운행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어 나고야와 하카타를 잇는 '킨세이(金星)', 도쿄 우에노역에서 도호쿠 최북단의 아오모리까지 이어졌던 '하쿠츠루(白鶴)' 등 다양한 열차가 581계의 전력 방식을 바꾼 형식인 583계 동차로 운행을 시작했다.

특히 1972년 열린 삿포로 동계 올림픽 때도 583계 전동차가 도쿄의 관람객들을 삿포로로 실어 날랐다. 세이칸 터널이 뚫리기 이전이었던 터라 임시 특급 침대열차 '올림피아'가 우에노에서 아오모리까지 583계 동차를 통해 운행했고, 아오모리에서 하코다테까지는 연락선을, 그리고 하코다테에서 삿포로까지 다시 디젤 열차를 타고 가는 방식이었다.

1985년 츠쿠바 엑스포 때도 이 동차가 차출되어 운행했는데, 도쿄에서 츠쿠바까지를 잇는 '엑스포 라이너'로 운행했기에 침대는 '봉인' 상태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몇몇 철도 동호인과 이용객들이 침대를 뜯어서 쓰는 통에 차장이 '침대를 꺼내면 침대 요금을 내야 한다'며 엄포를 놓는 일도 있었다고.

특히 '만능열차'라는 면이 돋보이면서 스키 폴이나 스노보드를 함께 실을 수 있는 임시 특급열차 '슈풀', 전국 고교야구대회인 고시엔에 출전하는 학교의 학생과 응원단을 실어 나른 '나인드림 고시엔' 등으로 운행하는 등 581ㆍ583계는 일본 현대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열차, 일본 수도권 과밀화에 따른 철도차량 부족의 대안으로 쓰이기도 하는 웃지 못할 만한 일도 있었다. 토호쿠 신칸센, 산요 신칸센 등 기존 583계 전동차가 오갔던 구간에 신칸센이 개통하고, 항공편 공급이 늘어 야간열차가 외면됨에 따라 581ㆍ583계 전동차에 롱시트를 달고 출입문을 추가하는 등, 통근열차에 준하게 쓰이도록 개조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차의 새 이름은 419계와 715계. 이렇게 개조된 전동차는 2010년대까지 운행을 이어나갔는데, 결국 이 열차는 탄생부터 황혼기까지 원래의 바람대로 '만능열차' 그 자체처럼 활용되었던 셈이다.

지금이라도 밤 공기의 습한 향을 내뿜을 것만 같은 열차.  / 박장식 객원기자
지금이라도 밤 공기의 습한 향을 내뿜을 것만 같은 열차.  / 박장식 객원기자

사라져가는 야간열차의 시대, 추억의 향기로 남은 '밤 기차'

581계 전동차 중 하나는 통근열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채 키타큐슈 모지코에 위치한 큐슈철도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처음 데뷔했을 때의 이름인 '월광'을 앞머리에 달고 있는 이 열차 위에 오르면 그때처럼 침대로, 좌석으로 모두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좌석 위에 있는 선반은 바로 쏟아 내리기만 하면 침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제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야간열차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 한국에서는 진작 정기적으로 오가는 야간열차가 폐지된 지 오래고, 일본에서도 야간열차는 선라이즈 이즈모ㆍ세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누군가의 설날, 그리고 누군가의 '오봉' 추억이 담겼던 열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셈.

그래도 큐슈철도기념관에 보존된 581계 전동차 위에 오르면 그 시절 야간열차에서만 맡았던 냄새가 반쯤 콧속에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 든다. 토목과 기술의 발전은 야간열차를 뺏었지만, 야간열차에 얽힌 추억만은 뺏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선두차만 달랑 남은 열차의 향기로 남은 듯하다.


철도경제신문 독자 여러분, 설 명절 행복하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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